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주 4.3사건 (문단 편집) == 결과 == 이 사건으로 인한 총 희생자 수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최대 제주도민 8분의 1이 죽거나 행방불명(추정치는 3만명에서 최대 8만명)된 것으로 추정된다[* 기록상에는 자체 조사를 했을 때 '신고만' 들어온 게 1만5천명이라고 한다. 다시 한번 말하지만 '신고만'으로 파악한 게 1만5천명이다.]. 말하자면, 친척 몇 다리만 건너면 4.3사건 희생자라는 뜻인데 실제로 오늘날도 제주도에 가 보면 촌락별로 제사가 거의 비슷한 날 치러지는 걸 보면 당시에 제주도민들이 얼마나 학살당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.[* [[트위터]]를 중심으로 '''광주에는 5월에, 제주에는 4월에 향냄새가 진동한다'''는 글이 나돈 바 있는데, 이는 너무 단순하고 도식적인 비교이다. 4.3사건은 5.18과 비교했을 때 인구가 적은 섬지역에서 만 단위 이상의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기 때문에 제주섬에 인구학적인 영향(최대 1/8 추산 학살을 피한 주민의 일본으로 이주 등)을 줄 정도였지만,518의 경우는 당시 80만 인구에 피해자 규모가 수백~수천명이므로 상당한 규모 및 비율의 차이가 있다. 사건의 성격도 꽤 다르며, 무엇보다도 4.3은 5.18과는 달리 4월 3일 전후가 중심이 된 사건이 아니다. 4.3이란 명명에는 이 헬게이트의 원인을 무장대의 봉기에 귀인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고, 실제 사건의 단초는 위에서도 서술하였듯이 3.1절 발포사건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. 그리고 4.3 사건에서 가장 중대하게 다루어져야 할 부분인 민간인 학살은 1948년 11월부터 본격 실시된 초토화작전 때문이었다. 이러한 이야기는 아마 현기영의 소설 [[순이삼촌]]의 일부분이 와전된 것으로 보인다. 주인공이 어느 하루에 동네 집집마다 다같이 제사를 지내는 것을 의아해하는 대목이 있는데, 사실 이 소설의 소재가 된 '''북촌리 학살'''은 1949년 1월에 발생하였다. 즉 토벌대가 전도를 돌아다니며 순차적으로 학살을 자행하였기 때문에 각 촌락별로 학살이 발생한 날에 제사를 지내는 것이지, 제주도 전체가 같은 날 제사를 지내는 것은 아니다.] 그 후유증은 아직도 지대하여 나이 지긋하신 어르신들과 대화하다 그쪽 화제가 나오면 진저리를 치실 정도다. 바로 눈 앞에서 가족이 살해당하는 걸 보셨는데 거기에 무덤덤할 수가 있겠는가? 심지어 그 사건으로 인해 보통 제주 밖을 일컫는 [[육지]](한반도측) 사람들에 대한 인식마저 극도로 악화되었다. 그래서 사건 이후 [[90년대]]까지(!) [[육지]]에서 제주로 시집오거나 장가온 사람들은 괜히 그런 이미지를 덧씌워받아 고생한 일이 많다. 그리하여 [[반공|레드 컴플렉스]]가 극심하였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